본문 바로가기

유익한 지식들/유익한 역사 지식

왕건의「실용주의 후삼국 통일정책」

 

 



왕건의 실용주의 후삼국 통일정책

 

1) 후삼국 성립과정

 

궁예는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고치고, 집권 초기에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으나 점차 횡포한 전제 군주로 변하여 국민과 지배계층으로부터 신망을 잃게 되었다. 궁예에 합류했던 왕륭의 아들 왕건은 궁예의 장군으로 공을 세워오다가 918년 신승겸, 홍유, 복지겸 등과 반란을 일으켜 태봉국을 뒤집어엎고 고려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한편 신라의 서부지방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왕이 되어 고려 및 신라에 끊임없이 공격을 가했다. 왕건은 신라의 거듭되는 요청에 따라 경주를 방문하고 환대 받았다. 9329월 후백제는 개경 기습을 시도하였으나 고려군의 반격으로 중도에서 물러났고 9349월에는 왕건의 공세를 취하여 운주에서 견훤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니 후백제의 30개의 성이 고려에 투항하여 왔다.
9353월 왕위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견훤의 아들 신검, 양검, 용검 등이 반란을 일으키니 이해 6월 견훤도 고려로 투항하여 왔다. 이에 왕건은 견훤을 상보로 높여 맞아들이고 노비와 함께 양주를 식읍으로 주어 환대하였다. 견훤의 투항에 대한 고려의 높은 대우는 신라왕 김부의 고려에 귀속할 결심을 빨리 내리게 했으며, 백관회의를 통해 고려와 합할 것을 결정하고, 수레에 금은보화를 싣고 귀족관리들과 함께 스스로 고려에 들어갔다. 935년 신라의 경순왕 때 평화적으로 신라와 통합하고 936년 후백제를 공격하여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2) 왕건의 통일정책

 

(1) 친신라정책 / 햇볕정책
궁예와 견훤은 타도 신라정책을 펼친데 반해 왕건은 친신라정책을 펼쳤다. 이는 통일신라의 1000년의 역사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신라와의 전쟁은 피함으로써 민족의 피해를 줄이고 정통성을 확보했다.

(2) 민생안정정책
왕건은 신라사회 말 진골귀족의 고대한 갈취와 수취에서 비롯한 농민의 궁핍으로 인해 신라사회를 뒤흔든 농민반란이 문제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민생을 안정시켜 기층사회의 움직임과 요망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이자 방침이 있었다.

(3) 중폐비사정책 / 포용정책
후고구려의 지도자가 궁예에서 왕건으로 바뀌고 국호마저 고려로 바뀌는 과정에서, 친궁예적인 호족들이 후백제로 이탈하거나 투항하는 것을 막고, 신라호족들에게도 등급에 따라 비단을 수십 수백 필을 주면서 스스로 몸을 낮추고 회유하여 돌아오도록 만들어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복안이었다.

(4) 안변척경책
한 마디로 이웃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정책이다. 현재의 국가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편안하게 하는 4강 안정정책이다.

(5) 기인제도와 사심관제도
기인제도는 왕건이 실시한 호족통합정책으로 지방호족의 자제를 볼모로 중앙에 머물게 하는 제도이다. 한 마디로 호족의 자식들을 포로로 중앙에 잡아놓는 것이다.
사심관제도는 후백제와 신라호족들에게 일종의 지방자치제처럼 관할하게 하여 반발세력들을 무마시키는 정책이다. 예로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계속해서 신라지역을 통치하도록 하였다.

(6) 힘의 우위정책 / 후백제를 무력으로 통일

(7) “씨 성의 하사정책과 명망있는 호족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드리는 결혼정책

 

 

3) 왕건의 후삼국 통일 도표

 

1. 신승겸 등과 궁예 축출, 고려 건국 (918)
2. 왕위 계승 문제로 견훤 몰락, 왕건에게 감 (934)
3. 신라 경순왕 왕건에 투항
4. 후백제와 전쟁으로 격퇴, 후삼국 통일(936)

 

4) 왕건의 후삼국 통일의 의의

 


왕건의 후삼국 통일은 단일민족의 완성을 가져온 대 역사적인 사건이라 말할 수 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무렵 대륙에서도 큰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907년 당이 거란에 망하고, 926년 발해가 거란에게 망하는 국제적인 대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특히 우방국가라고 생각하던 발해의 멸망은 고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두 나라 모두 고구려를 계승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발해가 멸망하자 수만 호의 지배층이 대거 고려로 망명해왔고, 왕건은 동족으로 간주하여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특히 발해 세자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성명을 내려주고 그를 왕실 족보에 넣어주어 당당한 왕족으로 대우하였다. 또 왕계로 하여금 발해 선조에 대한 제사를 받들도록 해줌으로서 고려와 발해는 정신적으로 통일되었다. 따라서 왕건은 후삼국 통일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통일을 완성했다는 점과 단일민족의 완성을 보였으며 의의가 매우 크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