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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지식들/유익한 역사 지식

역사적 측면에서 본「한국경제 발전 요인 4가지」

 

 



역사적 측면에서 본 한국경제 발전 요인

 

1953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 196182달러였다. 같은 해 아프리카 최빈국인 가나는 179달러로 우리나라보다 2.2배 높았다. 1950년대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이었으나 역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 한일협정 타결, 월남파병, 파독광부, 간호사, 중동건설 4개의 요인 때문에 한국경제 종자돈이 되어 활력을 불어넣어 경제 강국이 되었다. 특히 중동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박정희 대통령 결단에 의해 가내 경공업에서 몇 단계를 뛰어넘는 중화학공업국가로 변신했다. 수출이 10억달러에서 100억달러로 되는데 우리나라는 불과 7년이 걸렸고, 무역규모는 11440억달러로 세계 10위권 이내를 넘나들고 있다. 국민소득으로 볼 때는 31,349달러로 세계 7위를 돌파했다.


1. 한일협정 타결

 

1) 한일회담 과정
한일회담의 출발은 미국의 일본점령군최고사령부의 주선으로 개최되었다. 한일회담은 초기 단계인 1~3차 회담, 회담만 있고 교섭은 없었던 4~6차 회담, 본격적인 교섭에 들어가 조인까지 이루어진 7차 회담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한일회담은 4차로 거쳐서 개최되었다.  5차 회담은 장면정권 하에서 개최되었으나 5.16 군사쿠데타로 중단되었다. 장면정권은 1950년대 말~1960년의 경제적 불황과 정치적 위기를 배경으로 일어난 4.19를 등에 업고 등장한 정권이다. 1962년 제 7차회담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은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교환하여 제7차회담을 거쳐 1965 6 22일 제 8차 회담에서 정식 조인되었다.  8차 회담에서 체결된 한일조약은 여러 가지인데, 이중에서도 한일기본조약이 가장 중요하다. 한일기본조약은 한일관계의 국교수립, 양국기본관계의 수립을 정한 내용이다.

2) 김종필-오히라 메모 내용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씨와 오히라 일본외상이 합의한 내용은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조건차관 1억달러로 19621112일 합의를 보게 된 것이 한일회담의 물꼬를 트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제 8차회담인 1965622일 무상 3억불, 유상(해외경제협력기금) 2억불, 민간차관 3억불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3) 한일수교를 추진한 미국의 4가지 목적
한일수교를 추진하려했던 미국의 목적은 다음 4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한일수교로 인해 반공자유주의 진영의 결속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둘째, 한일 경제협력을 통해 일본의 기술과 자본, 그리고 한국의 값싼 노동력을 결합시킴으로써 한일 양국 경제발전과 군비 증강을 양립시키며 안전보장비용을 일본이 분담할 수 있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셋째, 안전보장 문제에 관해 소극적인 일본 국내의 여론을 완화시켜 안보문제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지도록 교육하려는 것이다.
넷째, 미국의 한국에 대한 부담을 일본에게 덜어주면서 미국은 더 좋은 방향으로 전략을 추진할 수 있다. 특히 베트남 전쟁을 고할 때 한국과 관련된 원조의 일부를 일본에서 부담할 수 있다면 미국은 베트남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2. 베트남 파병

 

1) 월남 파병 배경
파병 제안은 미국이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꺼냈다. 1960대 초 박정희 정부에게 경제성장이 정치권의 안전과 국가안보의 확립을 위한 필수요소로 여겨졌다. 따라서 한국정부에게는 베트남 참전을 통한 미국의 대한 원조의 회복이 중요한 외교과제였다. 또한 한국군의 현대화에도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한국은 베트남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다. 한일협정이 한국경제의 투자재원과 자금을 마련하는 기회였던 것처럼, 베트남 파병도 한국에게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미국은 혼자 힘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을 모두 부양하기 벅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미국은 패전의 상처에서 회복된 일본이 이 지역에 대한 경제, 군사적 지원의 일부를 분담하기를 바랐다. 즉 일본과 한국 사이의 관계 회복을 요구하였다. 한일협정은 이러한 맥락에서 추진되었다. 그러나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 간 회담은 양국의 국내 사정 때문에 1962년 말 이후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회담의 교착상태에 돌파구를 마련해준 것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었다.
애초 파병 제안은 미국이 아니라 박정희가 먼저 꺼냈다. 이 제안은 케네디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새로 출범한 존슨 행정부가 인도차이나에 대해 미국이 군사적으로 적극 개입하게 되면서 한일 정상화를 더 서둘렀다. 베트남전쟁에 전력을 집중해야하는 미국은 한국에 대한 지원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고, 그 방법은 국교회복을 통해 일본이 그 짐의 일부를 맡아주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에 따라 베트남 파병과 한일 국교 정상화는 거의 동시에 성사되었다. 베트남 파병의 경제적인 용인을 살펴보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국제 신용도가 낮기 때문에 경제개발로 인해 한국정부는 외자도입을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2) 파병 용사들의 희생대가와 경제 발전
한국 젊은이들은 만 86개월 동안 총 32만명의 한국군이 파견되어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의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부작용도 많았다. 미국의 화학무기 사용으로 고엽제 환자가 많이 생겼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 때의 경제성장률은 전투부대 파월 후인 1966년부터 주월군이 철수한 1973년까지 8년 동안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0.1%로서 상당기간 동안 우리의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였음을 의미한다.

 

 

3. 파독 광부, 간호사

 

1) 경제발전의 종자돈이 되다.
독일은 세계2차대전 후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놀라운 경제 성장으로 노동력 부족사태를 야기시켰다. 특히 광부와 간호사였다. 1963년 서독으로 파독 광부 500명 모집에 46,000명이 모여들 정도로 한국의 실업난은 심각했다. 그리하여 1963년부터 1976년까지 파독된 광부는 엄청나고 벌어들인 외화도 어마어마했다. 한국경제발전에 활력을 불어넣은 종자돈이 되었다.

2) 파독광부 간호사들의 역사적 의의
광산 노동자들은 3년 계약이 끝나면 체류허가가 연장되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간호사의 경우 독일병원과 양로원의 요청에 의한 계약기간 연장으로 남아 장기간 체류가 가능했다. 처음 독일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주사바늘을 처음 꽂아봤을 정도로 무지의 상태였다고 한다. 하지만 악착같이 배우고 공부한 끝에 기본적인 간호사들의 실력을 겸비한 한국 간호사 정도로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 간호사들은 1970, 1980년대 유럽이나 북미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여 해외 한인사회 이민 개척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4. 중동건설 진출

 

1) 부도 직전의 국가
1963년 우리나라 외환 보유고가 3천만달러까지 내려가 우리나라가 파산 직전까지 갔다. 그런데 오일쇼크로 또 한 번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2) 오원철 경제 수석의 중동 아이디어
오원철 경제수석은 외국 손님들을 만나 석유 파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중에서도 일본 쪽의 답이 흥미로웠는데 원유 값 인상으로 중동 산유국에 달러가 모여들어 이 돈으로 중동은 경제건설을 한다는 정보가 있다. 그래서 일본은 6.25전쟁 때나 월남전쟁 때 돈을 벌어들인 것과 같이 이번에는 중동에 진출하려고 노력 중에 있다라는 것이다.
이 답을 듣고 오원철은 우리나라도 중동에 진출하자.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진출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자. 그리고 기반을 구축하자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은 1974~ 1981년 동안 420억불을 벌어들이고 그 돈은 중화학 공업에 투자하여 경제성장을 다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의 근대사는 가난

 

내 체구가 이렇게 작은 것은 어렸을 때 못 먹어서 그렇다고 했다. 박정희 어머니는 낙태 기도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백남의는 6~7가지의 방법을 동원해 아이를 지우려고 했다. 간장을 한 사발 마시기도 했고, 밀기울을 끓여서 마시다가 까무러치기도 했다. 가난은 그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 가난 속에서도 박정희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두 권의 책, 한 권은 나폴레옹, 또 한권은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 전기였다. 나폴레옹과 이순신이 군인이었으므로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박정희는 장래에 군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5.16 군사혁명도 우연이 아니고 꿈의 실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5.16은 인권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역사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박정희가 새운 공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사실이다. 앞서 말한 한일 협정, 베트남파병, 광부,간호사 파독, 중동 진출은 박정희의 탁월한 지도력아래에서 행해질 수 있었던 대한민국의 경제적인 이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