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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지식들/유익한 역사 지식

독일의 통일「서독의 통일 정책과 과정」

 

 



서독의 통일 정책

 

독일은 2차 대전을 일으킨 전범자로 통일이 되려면 전승국 4(,,,)의 승인이 필요했고, 전승국의 4대국의 승인을 얻기 위해 10개월 동안 서독의 콜 수상은 4대국과 수 차례의 정상외교를 펼친 지대한 공헌자이다. 독일의 통일은 전문가를 정권이 바뀌어도 중용하여 전임자가 세워놓은 통일프로그램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통일으로 이끌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었다.


1) 독일 통일의 기본 원인

 

(1)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
독일 통일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통일은 불가능했다. 1989년 부시 대통령은 독일통일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명확히 함으로서 콜총리가 그해 9월 공개적으로 통일을 거론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2) 화해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힘의 우위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공산국가와의 관계에서는 힘의 우위가 뒷받침되어야 협상문제해결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 1980년대 미국이 소련과의 협상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전략방위구상을 통해 소련을 압박한 것이 주효했다. 또한 서독도 확고한 친서방노선을 통해 힘의 우위에 견지한 것이 소련과 동독과의 교섭을 이끌어갈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3) 경제적 지원은 전략적 고려 하에서 추진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서독정부는 동독과의 교류, 협력을 적극 추진하면서도 대동독 지원이 동독 공산정권 강화에 기여하지 않을지 여부를 신중히 고려했고, 동독에 경제지원을 할 때 반드시 대가를 받아내는 등의 전략적 고려 하에서 교류, 협력을 추진했다.

(4) 통일을 위해서는 국가 최고지도자의 확고한 의지가 중요
독일통일 과정에서 콜 총리의 확고한 의지와 적극적 노력은 동독주민의 절망과 분노를 통일 에너지로 전환시키고,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5) 안정되고 부강한 국가, 사회 건설이 가장 중요한 선결요건
2차 대번이 끝난 후 서독의 선진적인 민주제도, 풍요한 경제, 안정된 사회는 동독 주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가장 동경하는 모델이 되었다. 이러한 우월한 서독의 존재는 동독 공산정권의 정통성을 약화시키고, 공산정권에 대한 주민들의 환멸을 심화시켜 동독주민들이 서독의 편입을 선택토록 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2) 독일 통일의 7주역

 

(1) 독일 통일의 설계자 에곤바
93세를 일대기로 독일 통일의 장기적 기반을 다진 동방정책의 설계자로 지략가이다. 에곤바가 동방정책의 설계자였다면 브란트는 동방정책의 건설자이자 최고 지휘자겸 집행자이다. 즉 바늘과 실의 관계이다. 그는 유럽에서 냉전종식을 위해 독일의 특별한 역할을 강조하고, 현상타파를 위해서는 특히 경제적 분야에서 강력한 협력을 제안한다
에곤바의 통찰은 정확했고 빌리브란트가 집군하자 동방정책을 축조 집행하도록 했다. 한 순간에 통일이 아니라 투칭연설을 통해 단계적 접근을 하였고 그걸 착실하게 서독은 실행했다. 1990년 독일 통일도 ‘접근을 통한 전환’ 
결국 그 토대 위에서 완성된 결과물이다.

(2) 빌리브란트 수상
최측근 에곤바가 발제한 접근을 통한 변화정책인 신동방정책을 실시하여,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저지른 잘못과 역사반성에 토대를 두고 동서독과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그해 8월 이후 관계정상화를 위한 일련의 동방조약을 체결했다.
이어 197212월 동독과 동서독 기본조약을 비롯한 각종 교류, 협력 협정을 체결하는 등 동독과의 교류와 협력이 대폭 확대되었다.
그러나 19745월 브란트 총리가 동독의 스파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브란트 총리가 사임함으로써 사민당의 동방정책은 다시 한번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3) 헬무트 콜총리
1) 2차대전 전승국 4개국의 통일 승인을 얻어냈다. 
2) 통일된 독일이 NATO 회원국의 체결유무인 폴란드 서방국경선인 오데르-나이세선의 인정이 독일 통일의 핵심이었고, 앞서 말한 것들을 체결시켰다.

(4) 동독 주민의 민주화 요구
1) 우리는 한 민족이다.
2) 마르크가 안 오면 우리가 가겠다. (통일 구호)

(5) 고르바초프 대통령
1)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정책이 독일통일로 연결
2) 소련이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혁명과 탈 공산화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근거가 되었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포기하여 동독주민의 무혈혁명을 가능케 했다.
3) 고르바초프의 안보관
고르바초프의 안보관의 출발점은 인류는 핵무기로 인한 자멸의 위험에서 2000년대까지 완전히 철폐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핵시대에 있어서 초강대국간의 전쟁은 누구도 이길 수 없으며 따라서 군비축소를 통하여 공동의 평화를 모색해보자고 주장했다.

(6)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부시 미국 대통령은 콜 서독정부의 통일정책을 적극 지원하여 소련, 영국, 프랑스의 동의를 얻어내는데 일조했다.

(7) 서독 교회의 역할
마틴루터이 출생 500주년 기념대회를 서독교회 주도로 5년 동안 준비하여 동독의 아이스 레벤과 라이프치히에서 35개국에서 찾아온 20여만 명의 세계기독교지도자들이 모인 것이 전세계 TV로 생중계되어 사실상 독일 통일의 단초가 되었다.

 

3) 동 서독 간의 공식 정상회담

 

1, 2차는 브란트 슈도프, 3차는 슈미트, 4,5,6,7차는 콜이 등 7차례의 공식적인 정상회담과 6차례의 비공식 정상회담이 있었다.

4) 동독 정치범을 데려오다.

 

특기할 사항으로 1961년 동독의 인권탄압 사례 축적을 위해 중앙기록보존소를 설치하여 1962년부터 동독과 정치범 석방교섭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서독정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총 346400만 마르크 상당의 대가를 지불하고 동독 정치범과 그 가족 25만여 명을 서독으로 데려왔다. 동도 주민의 인권 개선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대표적인 사업평가다.
서독 측은 공산 치하에서 신음하는 동포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한다는 순수한 인도적 목적에서 사업을 추진했던 반면, 동독 측은 불만세력의 배출과 외화 획득에 목적을 두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5) 통일 마무리

 

동독 기민당과 사민당이 198945일 개원한 민주의회에서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서독정부와 통일협의를 개시함으로써 통일작업은 급진전되기 시작했다. 동독총리는 서독 수도 본에서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함께 화폐, 경제, 사회 통합 원칙에 합의 했다
동서독은 사실상의 통일을 이루었다. 동독은 공산국가들간의 군사동맹 기구인 바르샤바조약기구(WTO)에서 정식 탈퇴했으며, ‘동독의회가 독일민주공화국의 소멸을 의결함으로써 독일통일은 인류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합법적, 평화적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6) 독일 통일에서 얻은 교훈

 

독일 통일 30주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많다.
첫째,강대국 독일조차도 혼자 힘으로는 통일을 성공시키지 못했다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미동맹을 강화시키는 전제로 교류, 협략을 늘리는 길이 통일로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이 과정에서 주변 강대국의 동의와 협력을 얻어내는 지혜는 필수적이다. 남북간 무역, 통신, 협상을 통해 우선 사회 각 부문의 공유된 정체성을 남과 북이 확보하여 화해정책의 끈을 완전히 놓아서는 안된다.
둘째, 통일문제 전담 헌법기관의 창설에 대한 중지를 모을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면 통일정책 또는 방안을 두고 벌어지는 국론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고 상당히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
셋째, 한국의 통일을 직간접적으로 반대하는 나라와 고도의 외교술로 풀어야한다.
넷째, 서독의 외무장관 겐셔와 같은 탁월한 대표단이 있어야한다.
마지막으로 통일 비용이다. 서독은 통일되기 전후에 22740억 유로의 통일 비용을 장만하였다. 이러한 통일비용이 회담에 대한 뒷심이 생기는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도 서독의 통일 정책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고, 위 교훈들을 토대로 항상 준비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