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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지식들/유익한 역사 지식

김춘추의「삼국통일 정책과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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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의 삼국통일 정책

 

신라가 당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문무왕 때 통일을 이룬 것은 역사적으로 크나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독립된 기반 위에 단일민족 형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에게 대동강 이북의 땅을 내주긴 했으나, 통일신라는 발해와 함께 남북극 형세를 이루어 통일신라와 발해의 시대인 남북극 시대’를 만들었다. 
김춘추의 삼국통일은 적국에 몸을 던지는 고구려, 일본, 당나라의 방문외교가 얻어진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김춘추는 642년 백제에게 대야성을 함락당할 때 딸과 사위가 몰살당한 인생 최대의 시련을 맞았을 때, 신라로서도 연일 계속되는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 속에서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외교적 모험을 한 것이다. 김춘추의 평양행은 이러한 상황에서 결행되었고,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평양행에서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비슷하게, 왕건의 후삼국 통일도 겉모양은 비슷하지만 통일방식에 대해 큰 차이가 있다. 신라는 외세인 당과의 합작으로 통일을 이룩했지만, 왕건은 스스로의 힘으로 통일을 이룩하였다. 또한 거란에 멸망당한 발해 유민도 받아들여 민족 대통합을 이룩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가 크다. 왕건은 힘과 포용을 사용하여 백제에게는 힘으로, 신라에게는 우위정책을 유지하면서 대 신라의 포용정책이 주효하였다. 오늘 날의 한반도 통일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겠다.

1) 김춘추의 고구려 연개소문 방문외교(642)

 

금관가야 후손인 김춘추는 김유신 집안의 동생 문희는 결혼을 하여 정치적 결속을 다졌다. 그 무렵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이 거세져 당에 군사지원을 요청했지만 당태종은 당 왕족을 왕으로 삼겠냐는 황당한 제의를 했다. 그래서 고구려 연개소문을 전격 방문했고, 연개소문으로서 전리품이 필요한 시기에 김춘추가 평양성을 방문하였다. 김춘추와 연개소문 백제를 차지하고자 한 동맹을 했지만, 한강 이북 땅을 돌려달라는 제의에 결렬되고, 김춘추는 구속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2) 김춘추 647년 신라의 사신 자격으로 일본 효덕천황을 방문

 

김춘추는 용모가 수려하고 화술이 뛰어나다라고 일본서기 중 고토구 천황 편을 통해 기록되어있다. 한 때 인질의 신분으로써 왜와의 동맹을 요청했으나, 백제와 일본과의 300여 년간의 우호적인 관계로 거절당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3) 김춘추의 당나라 태종방문(648)

 

김춘추는 648년 일본에서 돌아오마자 곧장 당으로 건너갔다. 그 당시, ‘하나의 중국을 실현시키려는 당태종에게 막강한 고구려는 큰 걸림돌이었다. 그가 원하는 바를 실현시키고자 하기 위해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이러한 때 백제를 명망시킨 다음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김춘추의 제의 당 태종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이렇게 양국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평양성을 경계로 대동각 이북을 포기하기로 군사동맹을 결성하고, 신라의 군수보급과 나당의 군사력을 결합한 새로운 나당동맹이 탄생하였다.

 

 

4) 신라의 당축출

 

당은 우리나라 전체를 당의 지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와 신라에 각각 웅진도독부와 계림도독부를 두어 전체적으로 지배하고자 하였다. 그 뒤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당은 안동도호부를 두어(668), 백제, 고구려, 신라 등의 동방 전체를 총관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의 기대와는 달리 고구려, 백제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고, 이를 받아드릴 수 없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당과의 새로운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신라는 검모잠의 부흥군을 원조하여 당을 축출하였고, 안승을 맞아다가 고구려왕에 봉하였다. 또 백제 지방에 군대를 출동시켜 부여륭의 백제군과 당군을 각처에서 격파하였다. 결국 신라는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소부리주를 설치함으로써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신라군은 매초성의 전투를 위시한 한강 유역 일대의 전투에서 당군을 축출하고, 이에 당은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부터 요동성으로 옮김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신라는 대체로 대동강과 원산만을 긋는 선 이남의 땅을 점유하게 되었다.

5) 신라 3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나당동맹이라는 신라와 당으로 시작했지만 신라는 당의 지배에 항거하고 정치적이인 독립을 지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단일민족으로 형성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통일 신라는 한국민족의 독자적인 역사 발전의 터전이 되었다. 물론 신라의 통일은 불완전했다. 과거 삼국의 활동 무대였던 만주의 넓은 지역이 그 영역에서 벗어났고, 고구려 유민들은 발해를 건국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삼국 통일이 만들어 놓은 사회와 문화가 한국사의 주류를 형성하기 이르렀고, 커다란 민족사적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