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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주요 업적들」

 

 



이승만 대통령의 주요업적


1) 대한민국 건국 대업의 성취
이 박사는 광복 두 달 만인 19451016일 꿈에도 잊지 못한 조국에 돌아왔다. 그의 나이는 만 70, 이 박사는 혼신의 힘을 기울인 끝에 3년 후 드디어 대한민국 건국의 대업을 성취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이 민족보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나머지 조국을 소련의 속국으로 만드는 작업에 종사한다고 판단하여 그를 적대시했다. 그는 한반도를 5년간 신탁통치하기로 작정한 미, , 영 등 강대국의 협정을 무효화시켜야만 했다. 그는 또 좌우합작을 통해 연립정부를 세우려는 미군정의 하지중장과 여운형, 김규식 등 중간파의 계획을 좌절시켜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남한의 공산화를 서두르던 박헌영의 남로당과 힘겨운 승부를 겨뤄야만 했다. 그는 이러한 이념과 세력에 맞서싸우며 그를 믿어줄 범국민적 운동본부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시켰다.
다음으로 19479월 미국이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한국 문제를 UN에 이관하자 이승만은 임병직과 임영신을 UN에 급파 로비활동을 전개시켰다. 미국대표와 이들의 노력이 주효하여 UN총회는 “UN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미국의 결의안을 43:0으로 가결시켰다. 그 후 평양으로 찾아가 김정일의 허락을 받으려했지만 거절당하고, 19482UN소총회는 UN감시위원단의 접근 가능지역(남한)에서의 총선거 실시안을 가결했다. 이로서 UN은 이승만이 주장한 남한 단정수립안을 실현한 셈이다. 새나라 건설을 위한 총선거가 1948510일에 실시되었다. 무투표로 당선된 이승만은 531일 개원된 제헌국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국회의장 이승만은 헌법제정 작업에 총책임을 맡았다. 국회는 이승만의 주장을 수용하여 717일에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채택 공표하였다. 이어 이승만은 720일 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승만은 1948815일을 택하여 대한민국 탄생을 세계만방에 선포했다.

2) 차선을 선택한 단정 수립
이승만은 그의 과오가 업적보다 더 크게 부각되는 상황이다. 그 이유는 이승만이 4.19 학생시위 때 실각해 해외로 망명을 떠난 다음 그에 대한 격하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최대과오라 할 장기집관과 독재가 당시에는 물론이고 그의 하야 후에도 지식인들의 강력한 거부감과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 붕괴 이후에 들어선 장면정권이 곧 군사쿠데타로 전복된 다음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신군부정권이 도합 27년간이나 계속되어 이로 인한 권위주위 정치에 대한 지식인들의 혐오가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공적으로는 대체로 그의 독립운동, 건국, 농지개혁, 김일성의 남침격퇴, 한미동맥조약 체결 그리고 교육혁명 등이 거론되고 그의 과오로는 친일파 두둔, 전쟁 예방의 실패, 헌정유린, 언론탄압 등이 지적되고 있다.

 

 


3) 북한의 남침 격퇴와 한미 안보체제 구축
이승만은 김일성의 기습남침을 받고 즉각 미국에 지원을 호소해 유엔으로 하여금 북한군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의 한국파견을 결의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 참여해 한국을 방어하는데 성공했으나 중공의 개입으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휴전을 모색하게 된다. 장기간의 협상 끝에 1953727일 마침내 미국 주도로 휴전협정을 조인했다.
이승만은 그의 지론이었던 북진통일의 호기를 잃을 가능성이 생기자 미국의 휴전협정 조인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승만은 휴전협정이 조인되면 북한으로 송환될 반공포로로 27천 명을 석방함으로써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승만은 능숙한 외교솜씨를 발휘해 휴전의 대가를 미국정부로부터 얻어내는 데 성공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래 88일 서울에서 가조인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이다.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가조인한 날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며...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4) 농지개혁
건국 직후 이승만 정부가 농지개혁을 단행, 농민에게 농지를 분배한 것은 그 방식에 관련해 일부 비판이 있었지만 그의 큰 업적 중 하나이다. 농지개혁은 농지개혁법의 일부 미비조항을 개정하느라고 시간을 끌다가 6.25사변이 일어나 차질이 생기기는 했으나 대체로 크게 성공적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은 조선왕조 건립 때 태조 이성계가 단행한 과전법 이래 최대 규모인 동시에 비교적 성공적인 토지개혁이다.
특기해야 할 점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결정된 사실이다. 공산국에서는 예외 없이 지주들을 학살하고 농토를 몰수했다. 러시아는 혁명 후 집단농장화 과정에서 최소한 2천 만 명의 지주가 피살되었고 중국의 농지개혁에서도 5천 만 명 이상의 농민과 지주가 죽었다. 북한에서는 23만 명의 지주 중 15만 명의 지주가 신변안전과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내려온 사실로 미루어 지주들에 대한 박해가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5) 교육혁명
이승만 정부는 어려운 국가재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정부수립 이듬해인 19491월에 6개년간의 초등교육 의무화계획을 수립하고 19506월 이를 법제화한 교육법을 제정, 공포했다. 이 계획은 6.25 발발로 실시가 지연되어 휴전 후인 1954년부터 집행되었다. 그 결과 1959년까지 학령아동의 96%가 취학하는 성과를 올렸다. 문맹률은 1959년에 22.1% 내지 15.5% 감소했다.
이승만 정부는 초등교육뿐 아니라 중등 및 고등교육도 대폭 확충, 1959년까지 중학생은 해방 당시의 10, 고등학생은 3.1, 대학생은 12배나 늘어났다. 해외유학생도 이 시기 이후에 크게 늘어났다. 이들은 주로 미국으로 공부를 떠났다.
이승만이 이룩한 교육혁명, 특히 각급 학교의 민주주의 교육은 젊은 세대에 민주주의 의식을 심어 주어 민주정치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4.19 학생봉기가 발발한 것도 민주교육의 영향의 영향이 컸다. 이승만의 교육혁명은 박정희 정권 출범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된 경제개발정책을 맡을 인적자원을 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