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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지식들/유익한 역사 지식

남북한의 정부 수립 과정 「북한의 정부 수립 과정 / 남한의 정부 수립 과정」

 

 



남북한의 정부 수립 과정 


1. 북한의 정부 수립 과정

 

(1) 김일성의 입국
김일성은 1945919일 소련 해군 운반선을 타고 다른 부대원들과 함께 원산항으로 귀국했다. 소련군사령부는 그를 10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참석시켜 그를 조만식과 함께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서게 했다. 소련군당국은 조만식을 북한정권의 상징적인 존재로 내세우려고 집요한 노력을 했다. 수차례 그를 만나 반탁운동을 하지 않도록 설득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2) 김일성의 낙점 시기
조만식이 협조하지 않자 김일성을 최고지도자로 발탁한다. 김일성인 그는 33세의 젊고 정력적인 성격의 소유자인데다가 만주에서 활동한 빨치산 출신이다. 그러나 그 전에 소련군정은 서울 주재 소련 영사 샤브신이 추천한 박헌영이 있었지만 근복적으로 불신감을 가졌다. 왜냐하면 박헌영이 미군정이 사주한 인공에 가담했으며 종파홛동에 참여하고 스탈린이 미워하는 코민테른에 관계했다는게 그 이유였다. 그리하여 김일성은 그 해 7월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에 소환되어 스탈린으로부터 최종적으로 낙점을 받았다.

(3)김일성 인민군 군대 조직 완료
김일성은 또한 소련군의 지원 아래 군사조직도 일찌감치 조직했다. 19475월 인민군 집단군총사령부를 만들고 그 다음 19482월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안에 인민무력부의 전신인 민족보위국을 설치하고 조신인민군을 정식으로 창설했다.

(4) 정부 수립 완료
소련군당국은 194629일 평양에서 북조선 각 정당 사회단체, 각 행정부 및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표 본회의를 열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결성을 결의케 했다. 소련군정은 위원장을 김일성, 부위원장에 김두봉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소련군정은 북한 단독정권 수립을 위한 2단계 작업을 끝낸 셈이다.
김일성은 19467월 모스크바에서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받은 이후부터 본격적인 정권수립에 착수했다. 그는 그 해 11월부터 각급 지방인민회의 대의원을 뽑는 선거를 실시해 정식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했다. 19472월 국회에 해당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김일성을 선출함으로써 사실상의 정부수립은 완료됬다. 북조선인민위원회의의 선거와 인민위원회 구성은 남한의 19485.10선거보다 13개월이나 앞서 나갔다.
북한은 남한에서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기다렸다가 825일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했고, 98일 최고인민회는 미리 마련된 헌법초안을 정식헌법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99일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2) 남한정권의 정부 수립 과정

 

(1)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다.
해방을 맞이한 날 저녁, 신간회 활동을 같이하던 여운형과 안재홍 등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활동에 나섰다. 건준 지역지부도 잇달아 결성되어 8월말까지 145개 지부가 생겨났다. 건준에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띈 인사들이 참여하여 민족의 뜻을 대변할 민주적인 정부수립을 준비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 더 활발하였다. 이들은 건준에 참여하고 강제로 해체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 공산당은 전면적인 토지개혁은 물론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진보적 인사들이 두루 참가하는 인민정권을 세우자고 나섰다. 건준과 조선공산당은 미국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 민족끼리 정부를 만들어 놓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2) 좌우 합작을 통한 남한의 건국 시도
남한의 건국 과정은 획일적으로 움직이는 북한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남한에서는 미군정보의 좌우합작으로 다양한 정치세력이 활동하게 되면서 상당할 정도로 미국에 대해 자주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우파 세력은 916일에 와서야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민당을 창당하였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도 귀국을 서둘렀지만 미국정부는 이승만의 귀국을 방해했다. 미국정보의 관점에서 보면 이승만 같은 반공주의자는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 국방부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도움을 받아 김포비행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한국인들의 정부를 세우기 위해서는 연합국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민족통일 전선의 결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우익과 좌익을 모두 포용할 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했다. 19451123일 김구도 귀국하자마자 좌우의 정치세력을 모아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3)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 대립
신탁통치 반대를 주도한 것은 김구의 충칭임시정부 세력이었다. 194613일 좌익이 갑자기 신탁통치 지지로 태도를 바꿈으로써 남한 정국은 극심한 좌우 갈등에 빠져들게 되었다. 좌익은 연합하여 민족주의민족전선을 조직했다. 이에 맞서 우익은 연합하여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했다.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는 김규식, 총리에는 김구가 선출되었다. 이렇게 해서 남한의 정치세력은 광복된지 반면 만에 우익의 민주의원과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갈라졌다.

(4) . 소 공동위원회의 실패와 이승만의 정읍 발언
1946320일부터 모스크바의정서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지만 휴회에 들어감으로써 정부수립의 가능성은 없어지자 1946512일 남한의 우익은 독립전취국민대회를 열었다. 미국과 소련의 합의를 통해 정부를 세울 수 없다면 우리 스스로가 세우도록 해야 한다는 자율정부론을 내세웠다. 사실상 남한만의 건국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승만은 63일 전북 정읍에서 정읍 발언으로 알려진 대담한 제안을 했다. 모든 정당과 단체가 이승만을 비난했다. 미군정부까지도 비난할 정도였다.

(5) 미군정의 좌우 합작 시도
미군정부는 다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릴 것을 대비하여 김규식의 온건우파와 여운형의 온건 좌파를 결합한 좌우합작위원회를 출법하고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했다.

(6) 한반도 문제의 유엔 이관
1947929일 미국무부는 주한미군 철수안을 채택함으로써 우파세력에 충격을 주었다. 한반도가 전략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다는 미국방부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골치 아픈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떠넘기려했다. 미국의 방안은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남한과 북한에서 유엔 참관 아래 선거를 실시하여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된 의회를 구성한 다음 미군과 소련군이 모두 철수한다는 것이다.
미국 안은 19471114일에 유엔 총회를 통과했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기구로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구성되었다. 그것은 남한 우익의 승리였다. 그러나 서울에 도착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김일성은 그들이 북한 땅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남한의 좌익도 거부의 뜻을 밝혔다. 김구의 한독당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도 한국인이 스스로 힘으로 독립을 찾아야 한다는 자주의 뜻을 내세우며 유엔의 개입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유엔소총회는 1948226일 선거가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만이라도 실시하라는 결정을 내려 주었다.

 

 

(7) 남북 협상론 대두
유엔의 한번도 개입은 김구와 이승만을 갈라놓는 계기가 되었다. 김구는 한민당 간부인 장덕수를 암살한 배후로 의심받아 미 군사법정에 소환될 위기에 놓이면서부터 완전히 이승만과 손을 끊게 되었다. 1948210일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란 성명에서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8) 대한민국 건국 선포
1948510일 한반도 최초로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 그것은 앞으로 세워질 자유민주주의 체계의 토대를 놓기 위한 것이다. 1948531일 최초의 국회가 열렸다. 그러고는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세우기 위해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를 구성했다.
국회의 심의 거친 헌법은 717일에 공포되었다. 대통령은 이승만이 당연히 당선되었다. 1948815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했다. 194812월에는 소련군이, 19496월에는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외형적으로 꿈에 그리던 완전한 독립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