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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지식들/유익한 역사 지식

이승만 대통령의「과오 / 몰락의 원인과 근인」

 

 



이승만의 과오


미국에서 민주주의정치를 익힌 이승만은 국내에서 배재학당을 다닐 때부터 자유주의사상을 신봉한 당시로서의 급진개화파였다. 그는 당시 입헌구주제를 이룩하기 위해 몸소 실천운동을 벌인 행동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건국에 성공하고 대통령에 올라 권력을 잡은 뒤부터는 민주주의 의식에서 차츰 흐려져 권위주의에 빠졌다. 그리고 끝내 독재자가 되어 불명예스럽게 하야했다.

1) 개헌과 독재 체제의 강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민심을 잃어버린 이승만은 1952년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간접선거로는 재선이 어려운 실정에 놓였다. 이에 이승만은 관변조직과 경찰조직을 동원하여 자유당을 만든 뒤 지방자치선거를 서둘러 시행해, 지방의회를 장악하여 자신의 재선을 반대하고 있던 국회를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지방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이승만은 19525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와 함께 자유당은 지방의원을 동원하여 국회 해산 데모를 벌였고, 폭력조직을 동원하여 야당의원들을 위협하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 후 계엄령을 선포한 이승만은 74일 경찰과 군으로 국회를 포위한 가운데 직선제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켰다.(발췌개헌)
19545월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자유당이 크게 승리하자 이승만은 장기집권의 야심을 채우려고 19549월 국회에 초대대통령에 한하여 3선 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의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개헌안은재적의원 203명 가운데 찬성 135명으로 개헌선인 136표에서 한 표가 모자라 부결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선포를 다시 뒤집고 개헌선은 사사오입하면 135표라는 억지 논리로 통과 선언을 하였다.(사사오입 개헌)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강력한 후보였던 신익희가 사망하는 바람에 대통령 선거 결과는 이미 예상되었다.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이 자유당의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또 대통령 후보로 나선 조봉암이 약 30%의 득표율을 기록한 것도 커다란 사건이었다. 당시 조봉암은 이승만의 무력통일론, 북진통일론에 반대되는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면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승만 정권에 싫증이 나서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도 작용하여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봉암은 19561110일 진보당을 만들었다.
19581월 경찰은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 등 간부 10명을 검거하여 진보당을 불법화시키는 조치를 하였다. 당시 죄명은 진보당이 주장한 평화통일론이 국시를 위반했으며 조봉암이 간첩이라는 혐의였다. 조봉암은 국가보안법과 불법무기소지죄로 적용되어 징역 5년을 받았다. 그러나 2심에서 간첩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2) 친일파 처리 문제 실패
친일파 처리문제는 해방정국에서 최대의 정치쟁점 중 하나였다. 제헌국회는 건국 직후인 194897, 소장파의원들이 제출한 반민족행위처벌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활동은 이승만 정부의 비협조와 친일 경찰의 방해로 곧 난관에 부딪혔다. 특위가 친일경찰관을 체포하려 하자 경찰은 특위사무실을 습격했으며 5일 후에는 이승만 정부가 마침내 특위의 수사를 보조하던 특경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은 그야말로 천추의 한을 남긴 과오였다.
결국 이승만은 1950620일까지로 되어 있던 반민법의 공소시효를 1949831일로 줄어 친일파 청산을 봉쇄하여 반민특위활동을 서둘러 마감하였다.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에 반대한 것은 이들이 자신의 정권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반민특위가 무너짐으로써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읽고 말았다.

 

 

이승만 몰락의 원인과 근인


1) 원인

 

(1) 부산 정치파동(1952.05)
이승만은 직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헌 헌법으로는 대통령에 재선하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헌법 개정을 위해 전쟁 중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공비 토벌을 구실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백골단, 땃벌대 등 폭력 조직을 만들어 국회 해산을 요구했고, 개헌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 47명을 국제 공산당의 자금을 받았다는 구실로 체포, 구속하였다.

(2) 발췌개헌(1952.07)
이승만은 국회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하고 장기 집권을 위해 강제력을 동원하여 헌법을 개정하였다. 당시 정부의 개헌안과 국회의 개헌안이 충돌하자 양 개정안을 발췌하여 개헌안을 만들었기 때문에 발췌개헌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대통령을 직선으로 선출하는 정부의 안이 반영되었다.

(3) 사사오입 개헌(1954.11.29.)
개헌안의 핵심 내용은 초대 대통령의 대통령 선거 출마 제한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재적의원 203명 중 개헌안 통과 2/3135,333명이 넘는 136명에 1명 부족한 135명이 찬성하였다. 소수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이 되지 못하여 인격으로 취급할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하면 135명이 된다는 논리로 가결을 선언하였다.

(4) 진보당 사건(1958.01)
사사오입 개헌안이 통과되자 이에 반대하는 민주 국민당과 무소속 의원들로 이루어진 민주당이 결성되었다. 19565월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으로 민주당 후보인 장면이 당선되고, 진보당의 당수 조봉암이 서울과 경북 등지에서 약진하였다. 또한 이어진 제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자유당의 개헌선을 지지하였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진보당 당수 조봉암과 박정호 등을 간첩 혐의로 사형에 처하였다.

(5) 2.4 정치파동(1958.12.24.)
이승만과 자유당은 대공 사찰 강화와 언론 통제를 골자로 한 신국가보안법과 지방 자치제 개정안을 경찰을 동원하여 야당의원을 국회 지하실에 감금시키고 통과시켰다. 이어 개정된 보안법을 통해 경향신문 폐간하였다.

2) 근인

 

3.15부정선거
19603.15부정선거는 4대 대통령선과 제 5대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부정행위를 감행하였다.

 

- 민주당이 폭로한 3.15 부정선거 지시 비밀 지령 -

1. 4할 사전 투표 :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든 기권표 등을 그 지역 유권자의 4할 정도씩 만들어 투표 시작 전에 자유당 후보에게 기표하여 투표함에 미리 넣도록 할 것.
2.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 투표 : 자유당 후보에게 투표하도록 미리 공작한 유권자로 하여금 3인조 또는 5인조의 팀을 편성시켜, 그 조장이 조원의 기표 상황을 확인 후 기표한 투표용지를 자유당 측 선거 운동원에게 제시하고 투표함에 넣도록 할 것.
3. 완장 부대 활용 : 자유당 측 유권자에게 자유당이란 완장을 착용시켜 투표소 부근 분위기를 자유당 일색으로 만들어 심리적 압박을 주어 투표하게 하는 것.
4. 야당 참관인 축출 : 민주당 측 참관인을 매수하여 참관을 포기시키거나 여의치 않을 때는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투표소 밖으로 축출할 것.
5. 투표함 바꿔치기 : 야당성향이 강한 투표구는 수송중에 아예 투표함을 바꿔치기한다.
6. 개표수 조작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