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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6.25전쟁)의 원인규명 -「남한의 북침설 / 미국의 함정설 /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외교력」



 

 

한국전쟁의 원인규명 - 「남한의 북침설 / 미국의 함정설 /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외교력」

 

2. 북침설의 허구성

 

1) 이승만 대통령의 낚시와 한심한 정부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이승만에게 보고하기 위해 구방장관 신성모가 경복궁 내 경회루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그에게 달려간 것은 1950625일 오전 10시경이었다. 인민군이 38선에서 작전을 개시한지 무려 6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보고가 이렇게 늦어진 것은 그날이 일요일이어서 신성모가 휴가 중이었기 때문이다.
신성모는 이승만에게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해 오전 9시에 개성이 함락되고 춘천 근교로 탱크를 앞세푸고 밀려들고 있으나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했다. 이에 이승만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 그 놈들 장난치다가 그만 두겠지하고 낚시대를 거두어 경무대로 향했다.
이날 오후 2시가 돼서야 뒤늦게 열린 임시국무회의에서도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후방사단을 전선에 투입해 반격작전을 개시하면 북한군을 곧 퇴각시킬 수 있다고 보고했다. 신성모는 “5일 이내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보고했고 채병덕은 적을 의정부 밖으로 격퇴했으며 3개 사단이 후방에서 올라오면 3일 이내 평양을 점령해 보겠다고 보고해 의원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잠시 후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으로부터 의정부가 위급하다는 보고를 받은 채병덕은 대경실색했다. 이날 서울 상공에는 이미 북한 전투기가 출현해 초계비행을 하고 있던 긴박한 상황이었다. 정부 수뇌들이 이렇게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 북한군은 벌써 동두천과 의정부를 돌파해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이처럼 신속하게 남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아무런 대비도 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2) 비상계엄령을 623일 해제했다.
6.25전쟁을 앞두고 정부에서 고작 한 일이라곤 북한국의 위협을 강조하던 육군참모총장 신태영을 실전 경험이 없고 무능한 채병덕으로 바꾼 것밖에 없다. 북한군의 남친 가능성에 무관심했던 채병덕은 공교롭게도 610일 전방의 유능한 지휘관을 후방으로 돌리는 사단장 인사이동을 단행해 3.8선 방어력을 약화시켰다. 그는 51일부터 전군에 내려진 비상경계령을 623일 기해 해제해버렸다. 하필이면 24일 저녁에는 새로 건립된 서울용산의 육군장교구락부 개관 기념파티가 열렸다. 군 수뇌들은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골아 떨어져 북한군의 남침사실도 모른 채 일요일 아침까지 늦잠을 자는 한심한 사태가 벌어졌다.

3) 미국의 군수물자 지원이 전혀 없었다.
미국의 로버츠 단장은 한국의 지형으로 보아 탱크가 쓸모없다는 주장을 해서 한국군의 탱크 요구를 거부했던 인물이다.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특사로 한국을 방문했던 제섭 박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로버츠 고문단장이나 신성모 구방장관 그리고 한국군 장교들은 적어도 전투기와 대공포만이라도 지원해줄 것을 강력하게 원했으나 허사였다.
정부가 미국의 병력 지원은 바랄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군수물자의 충분한 지원을 약속받지 않고 북침이라는 엄청난 전쟁 계획을 세우려 했을까? 전쟁을 시작하면 미국이 도울 것이라는 가정을 두고 시작한다 하더라고 그 가정이 그대로 실현된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북침은 어려웠을 것이다.

4) 북한은 이승만 결재 서류의 자를 조작하여 활용했다.
북한이 제시한 실증적인 증거라는 것은 서울 점령 후 인민군 경무대에서 찾아낸 이승만의 이름이 적힌 자 서류 몇 가지였다. 그것을 이승만이 전쟁 준비를 재가한 것처럼 날조해 북침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전 세계 언론에 배포하여 상당한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그 자료 또한 북한에 의해 100% 날조된 것이다.

 

 

3. 함정설(음모설, 유인설)

 

미국의 함정설이다. 일종의 거대한 음모설과 유인설이기도 하다. 미국이 한국을 포기한 것처럼 위장하고 한국군의 현대화와 국군의 중무장을 의도적으로 피하면서 북한을 전쟁으로 유인했다는 함정설이다. 이 설은 아직도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이 한국전쟁을 시작하려고 한국과 대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담긴 애치슨의 돌출지역 방어선을 발표해 일종의 함정을 만들었으며 그것에 의해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이 속아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음모설이다.
그 연속선상에 있는 주장이 되겠지만 미국은 북한이 중장비로 무장하고 소련제 탱크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투기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의도적으로 로버츠 미국 군사고문단장으로 하여금 산이 많은 한국의 지형으로 보아 탱크는 무용지물이라는 주장을 하게 했고 한국군이 탱크로 무장하는 것을 막았으며 한국군에게 전투기도 공급해주기 않았다는 것이다.

1) 주한 미군 철수
이승만 정부에 있어서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주한미군의 철수였다. 미국은 한반도가 전략 가치가 없다는 판단 아래 주한미군을 철수하기로 한 것이다. 1948815일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맥아더 장군은 축사에서 만일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자에게 공격받는다면 나는 마치 켈리포니아를 지키듯이 대한민국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러한 공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미군을 철수하였다.

2) 미 국무장관 애치슨 라인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방위선 외곽의 국가(대만, 한국)의 안보에 대해서는 군사적 공격이 있을 경우 1차적인 책임은 공격을 받은 국민이 이에 대항하고 그리고 나서 유엔현장을 준수하는 전 세계 문명국의 개입에 의존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통합참모본부 의장 브래들 리가 작성한 아시아의 극비전략계획서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한반도를 군사적 수단으로 방위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

4.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과 외교력

 

19517월 시작된 휴전회담은 2년을 끌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포로 송환 문제였다. 트루먼과 자유세계의 지도자들은 북한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군 포로들이 본국으로 송환될 경우 숙청당할 것을 매우 우려했다. 그래서 그들이 내높은 결론은 그들의 자유의사에 따라서 한국과 자유세계에 남고자 하는 반공 포로들을 되돌려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공산 세력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공산 세력과의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25천명의 반공 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하여 그들에게 자유를 되찾게 해준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에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대북한 군사억지력의 확보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한미군사동맹조약체결을 요구했다. 마침내 미국은 정전협정 체결과 동시에 한미군사동맹을 체결하기로 약속했다. 한미군사동맹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은 확고한 대북한 억지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6.25전쟁 이후에 또 다른 전쟁을 방지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 민주화와 경제 번영에도 크게 기여했다.